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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 2세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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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에 2세는 1204년부터 1217년까지 노르웨이 국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트뢰넬라그 출신의 귀족 보르 구토름손과 시구르 2세의 딸인 세실리아 시구르스다테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1204년 구토름 시구르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잉에 2세는 '바글레르'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다. 1208년 평화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 내전을 종식시켰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도 권력 분점은 지속되었다. 잉에 2세는 1217년 사망했으며, 호콘 4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역사가들은 잉에 2세를 나약한 왕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내전을 중단시킨 강한 통치자였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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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 2세 (노르웨이)
기본 정보
잉에 2세 보르손의 인장
잉에 2세 보르손의 인장
군주호노르웨이 국왕
이름잉에 2세 보르손
로마자 표기Inge II Bårdsson
통치
즉위1204년 8월
퇴위1217년 4월 23일
선임자구토름
후임자호콘 4세
생애
출생1185년
사망1217년 4월 23일
사망 장소니다로스
매장지니다로스 대성당
가문
가문고드윈 (부계), 길레 (모계)
가족 관계
아버지보르 구토름손
어머니세실리아 시구르스도테르
자녀구토름 잉에손

2. 생애

1204년 8월 구토름 시구르손 국왕이 사망하면서 잉에 2세가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다.[3] 당시 노르웨이는 스베레 국왕 사후 그의 아들 호콘과 손자 구토름이 2년 안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스베레의 오랜 적이었던 바글레르는 이 틈을 타 에를링 스타인베그를 중심으로 비켄을 침략했다.

어린 구토름 국왕의 사망 이후, 비르케베이네르는 바글레르에 대항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들은 구토름의 섭정이었던 미친 호콘을 원했으나, 니달로스 대주교 에이리크와 트뢰넬라그 농민들은 잉에를 지지했다. 결국 잉에가 국왕이 되고, 호콘은 군대 지도자로서 왕실 수입의 절반을 받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3]

이후 4년 동안, 비르케베이너와 바글레르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바글레르 왕 에를링은 1206년에 사망했지만, 바글레르는 새로운 왕 필리프 시몬손 아래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3] 바글레르는 퇸스베르그오슬로를 포함한 비켄 지역을 통제했고, 잉에 왕은 니드로스를 포함한 트뢰넬라그를 통제했으며, 서부 노르웨이의 베르겐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1206년 4월 22일, 바글레르는 잉에의 누이 시그리드와 잉에 자신의 결혼 축하 행사 동안 니드로스를 공격했고, 잉에는 영하의 온도에서 니델바 강을 헤엄쳐 건넌 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다음 해, 비르케베이너는 바글레르의 요새 퇸스베르그를 성공적으로 공격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전쟁은 계속되었다.

1207년 가을, 니드로스의 토레 대주교와 오슬로의 니콜라스 주교는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1208년 가을, 로갈란의 크비츠욨에서 잉에 왕, 필리프 왕, 호콘 백작 간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합의 결과 필리프는 왕의 칭호와 왕실 인장을 포기했다. 그는 잉에 왕 아래에서 백작의 칭호를 가지고 보후슬렌을 제외한 비켄과 함께 동부 노르웨이를 계속 통제하기로 했다. 호콘 백작은 베르겐과 함께 서부 노르웨이를 받았고, 잉에는 필리프와 호콘의 주군이자 니드로스를 포함한 트뢰넬라그의 직접적인 통치자로서 유일한 왕이 되었다. 조약을 확정하기 위해 필리프는 스베레 왕의 딸이자 잉에 왕의 사촌인 크리스티나 스베르레스도테르와 결혼했다.

이 평화 조약은 잉에의 재위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필리프는 조항을 존중하지 않고 왕의 칭호를 계속 사용하면서 왕실 인장을 유지했다. 잉에와 그의 형제 호콘 사이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였다. 필리프가 계속해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호콘은 자신도 왕으로 선포하려 했지만 잉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서로를 살아남은 형제가 다른 형제의 영토를 상속받고, 둘 중 누구의 적자라도 두 형제의 영토를 모두 상속받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호콘에게는 적자가 있었지만, 잉에에게는 기리드라는 첩에게서 얻은 사생아 구토름(1206년 출생)만 있었다.

1214년, 잉에는 트뢰넬라그의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호콘 백작은 이 봉기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두 형제 사이에는 공개적인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호콘은 1214년 크리스마스 직후 베르겐에서 자연사했다. 잉에는 그의 왕국을 차지했다.

1217년, 잉에는 니드로스에서 병에 걸렸다. 병을 앓는 동안 그는 그의 이복 동생 스쿨레 보르드손을 백작이자 군대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1217년 4월 23일, 잉에가 사망했다. 그는 니드로스 대성당에 묻혔다.[2] 1206년에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잉에 왕과 호콘 백작의 궁정에서 자란 스베레 왕의 서손자인 13세 호콘 호콘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스쿨레는 그 후 몇 년 동안 백작이자 '사실상' 통치자로 남아있었다.

2. 1. 배경

잉에 2세는 트뢰넬라그 출신 귀족인 보르 구토름손과 그의 아내 세실리아 시구르스다테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에의 아버지 바르드는 트뢰넬라그 지역의 저명한 ''렌드만''이었으며, 토스티그 고드윈슨의 후손이었다. 그는 12세기 말 마그누스 에를링손과의 수년간의 전쟁 끝에 비르케베이네르 파를 권력에 올려놓은 스베레 왕의 초기 지지자였다. 잉에의 어머니 세실리아는 시구르 문의 딸이었다. 그녀는 스웨덴 베름란드에서 라우스피커 폴크비드와 결혼했었다. 스베레가 노르웨이 왕위를 차지한 후, 세실리아는 남편을 떠나 노르웨이로 가서 폴크비드와의 결혼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대주교는 폴크비드와의 결혼을 무효화했고, 스베레는 그녀를 신뢰하는 추종자인 바르드 구토름손과 결혼시켰다. 잉에는 바르드와 세실리아의 외아들이었다.

2. 2. 즉위

1204년 8월 구토름 시구르손 국왕이 사망하면서 잉에 2세는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3] 당시 노르웨이는 스베레 국왕 사후 그의 아들 호콘과 손자 구토름이 2년 안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스베레의 오랜 적이었던 '바글레르'는 이 틈을 타 에를링 스타인베그를 중심으로 비켄을 침략했다.

어린 구토름 국왕의 사망 이후, '비르케베이네르'는 '바글레르'에 대항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들은 구토름의 섭정이었던 미친 호콘을 원했으나, 니달로스 대주교 에이리크와 트뢰넬라그 농민들은 잉에를 지지했다. 결국 잉에가 국왕이 되고, 호콘은 군대 지도자로서 왕실 수입의 절반을 받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3]

잉에 2세는 1207년까지 바글리당의 왕 필리프 시몬손과 대립했으나, 이후 필리프가 잉에 2세의 왕위를 인정하고 화해하면서 필리프는 자신의 영토(비켄)를 계속 지배하게 되었다.[3] 잉에 2세는 이복형 호콘 광백의 큰 영향을 받았으며,[3] 호콘 광백은 1214년에 사망했다.[4]

2. 3. 치세

1204년 8월 구토름 시구르손 국왕이 사망하면서 잉에 2세는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다.[3] 이후 4년 동안, '비르케베이너'와 '바글레르'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바글레르' 왕 에를링은 1206년에 사망했지만, '바글레르'는 새로운 왕 필리프 시몬손 아래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3] '바글레르'는 퇸스베르그오슬로를 포함한 비켄 지역을 통제했고, 잉에 왕은 니드로스를 포함한 트뢰넬라그를 통제했으며, 서부 노르웨이의 베르겐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1206년 4월 22일, '바글레르'는 잉에의 누이 시그리드와 잉에 자신의 결혼 축하 행사 동안 니드로스를 공격했고, 잉에는 영하의 온도에서 니델바 강을 헤엄쳐 건넌 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다음 해, '비르케베이너'는 '바글레르'의 요새 퇸스베르그를 성공적으로 공격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전쟁은 계속되었다.

1207년 가을, 니드로스의 토레 대주교와 오슬로의 니콜라스 주교는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1208년 가을, 로갈란의 크비츠욨에서 잉에 왕, 필리프 왕, 호콘 백작 간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합의 결과 필리프는 왕의 칭호와 왕실 인장을 포기했다. 그는 잉에 왕 아래에서 백작의 칭호를 가지고 보후슬렌을 제외한 비켄과 함께 동부 노르웨이를 계속 통제하기로 했다. 호콘 백작은 베르겐과 함께 서부 노르웨이를 받았고, 잉에는 필리프와 호콘의 주군이자 니드로스를 포함한 트뢰넬라그의 직접적인 통치자로서 유일한 왕이 되었다. 조약을 확정하기 위해 필리프는 스베레 왕의 딸이자 잉에 왕의 사촌인 크리스티나 스베르레스도테르와 결혼했다.

이 평화 조약은 잉에의 재위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필리프는 조항을 존중하지 않고 왕의 칭호를 계속 사용하면서 왕실 인장을 유지했다. 잉에와 그의 형제 호콘 사이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필리프가 계속해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호콘은 자신도 왕으로 선포하려 했지만 잉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서로를 살아남은 형제가 다른 형제의 영토를 상속받고, 둘 중 누구의 적자라도 두 형제의 영토를 모두 상속받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호콘에게는 적자가 있었지만, 잉에에게는 기리드라는 첩에게서 얻은 사생아 구토름(1206년 출생)만 있었다.

1214년, 잉에는 트뢰넬라그의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호콘 백작은 이 봉기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두 형제 사이에는 공개적인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호콘은 1214년 크리스마스 직후 베르겐에서 자연사했다. 잉에는 그의 왕국을 차지했다.

1217년, 잉에는 니드로스에서 병에 걸렸다. 병을 앓는 동안 그는 그의 이복 동생 스쿨레 보르드손을 백작이자 군대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1217년 4월 23일, 잉에가 사망했다. 그는 니드로스 대성당에 묻혔다. 그는 1206년에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잉에 왕과 호콘 백작의 궁정에서 자란 스베레 왕의 서손자인 13세 호콘 호콘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스쿨레는 그 후 몇 년 동안 백작이자 '사실상' 통치자로 남아있었다.

2. 4. 죽음과 계승

잉에 2세는 1217년에 사망하여 니다로스 대성당에 매장되었다.[2] 그는 바글리당의 왕 필리프 시몬손과 1207년까지 싸웠으나, 이후 필리프 시몬손이 잉에 2세의 노르웨이 왕위를 인정하고 양측이 화해하였다. 필리프는 잉에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왕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토인 비켄(비켄)을 지배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3]

2. 5. 평가

많은 역사가들은 잉에 2세를 다소 나약한 왕으로 평가했다. 그는 노르웨이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고, 필리프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며 합의를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바글레르와 권력 분점에 동의하고 이를 고수했다.[3] 이러한 시각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사람들은 잉에가 더 호전적인 비르케베이네르의 압력을 견뎌내고 파괴적인 내전을 한동안 중단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강한 통치자였다고 주장한다.

바글레르 사가는 잉에 2세를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연회를 싫어하고 가까운 친구들과 자신의 처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는 일부 부하들에게 비판받는 성격이었다.

3. 가족 관계

잉에 2세는 애첩 귈리스와의 사이에서 서자 구드룸(1206년생)을 두었다.

참조

[1] 웹사이트 Inge 2. Bårdsson – Store norske leksikon https://snl.no/Inge_[...] 2023-04-19
[2] 웹사이트 Inge 2. Bårdsson https://nbl.snl.no/I[...] 2023-01-15
[3] 웹사이트 Inge 2. Bårdsson https://snl.no/Inge_[...] 2023-01-15
[4] 웹사이트 Håkon Galen https://snl.no/H%C3%[...] 202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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